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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이 없이 산다는 건, 단순히 ‘떠돈다’는 게 아니다

by 스토리플로우 2025. 4. 17.

 

집이 없이 산다는 건, 단순히 ‘떠돈다’는 게 아니다

 

 

 

장소가 아니라, 리듬을 중심으로 살아간다는 것

디지털 노마드에게 있어 '집이 없다'는 것은 삶의 중심이 사라졌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새로운 중심을 만든다는 말에 가깝다. 그것은 '주소'나 '공간'의 개념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시간 리듬과 감정의 흐름을 중심으로 삶을 재편하는 것이다.

노마드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특정한 도시나 집에 정착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만의 루틴과 일상을 유지하면서 어느 곳에서든 비슷한 흐름을 만들어낸다. 익숙한 공간이 아닌, 익숙한 하루의 구조가 중요한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차를 마시고, 일정 시간 일하고, 산책을 하고, 글을 쓰는 루틴은 장소와 무관하게 계속된다. 이는 공간의 안정감보다 리듬의 지속성이 더 중요한 삶의 방식이다.

 

실제로 이런 삶을 살다 보면 '오늘 어디서 자는가'보다 '오늘 어떻게 보냈는가'가 훨씬 더 중요한 기준이 된다. 리듬이 유지된다면, 그날 묵는 곳이 호텔이든 게스트하우스든 큰 의미가 없다. 공간이 아니라 시간의 짜임새가 삶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짜임새를 만드는 주체는 언제나 '나'다.

 

집이 없다는 말은 때때로 '불안정'이나 '책임 회피'로 오해된다. 그러나 노마드의 삶에서 '정착하지 않음'은 삶에 대한 책임을 미루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책임을 더 가까이 받아들이는 방식일 수 있다.

매달 어디서 지낼지 정하고, 숙소를 찾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며 일상을 설계하는 과정은 상당한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이것은 누군가 대신 정해준 스케줄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을 스스로 책임지고 구성하는 일이다. 지도를 그리는 것도, 방향을 정하는 것도 온전히 자기 자신이다.

 

노마드로 산다는 것은 매 순간의 선택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지는 삶이다. 고정된 공간과 직장이라는 외부 틀에 의존하지 않고도, 일하고 생활하고 관계를 맺는 방식을 꾸준히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자기 주도적인 삶의 형태는 결코 가볍지 않다. 오히려 ‘정착’을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 깊이 고민하고, 더 철저히 계획해야 한다.

 

 

 

소유보다 경험을 우선하는 삶의 태도 

집이 없는 삶은 소유의 개념을 자연스럽게 내려놓게 만든다. 디지털 노마드가 되면 짐을 최소화하게 되고, 필요한 것들만 들고 다니며 살아간다. 짐이 많을수록 이동은 어렵고, 이동이 어렵다면 자유롭고 유연한 삶의 흐름 역시 방해받는다.

이러한 삶은 결국 물건보다 경험에 집중하는 태도를 만든다. 새 옷 한 벌보다 기억에 남는 여행지에서의 하루, 새 가전제품보다 마음에 남는 풍경이 더 중요해진다.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한다는 것은 삶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는 것’ 중심으로 바꾸는 일이다.

 

또한, 이런 태도는 불확실성에 대한 내성을 키운다. 노마드의 삶에서는 언제든 숙소를 바꿔야 할 수 있고, 계획했던 일이 어그러질 수도 있다. 이럴 때 소유보다는 경험 중심의 사고방식은 큰 무게를 덜어준다. 삶을 통제하기보다 흐름에 맞게 반응하고 유연하게 대처하는 힘, 그것이 집 없이 사는 삶이 주는 또 다른 배움이다.

 

정해진 집이 없다는 것은 매번 새로운 환경에서 눈을 뜨고, 새로운 거리와 소리를 마주한다는 뜻이다. 반복되는 일상의 풍경이 사라졌을 때, 우리는 더 민감하게 주변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때로 피로하지만, 동시에 감각을 깨우는 경험이기도 하다.

 

노마드의 삶은 익숙함 속에서 무뎌졌던 감각을 다시 예민하게 만든다. 커피의 향, 바람의 온도, 이웃의 언어, 거리의 리듬—all 이것이 삶의 일부로 더 또렷하게 다가온다. 이국적인 풍경이나 문화만이 아니라, 나 자신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 자체가 달라지기 시작한다.

감각이 깨어나면, 삶은 더 생생해진다. 매일 아침 다른 도시에서 눈을 뜬다는 것은 어쩌면, 매일 다른 감정과 가능성으로 자신을 마주하는 일이다. '집'이라는 물리적 구조가 주는 안정 대신, 살아 있다는 감각이 삶을 단단하게 만들어준다.

 

노마드에게 있어 떠남은 단절이 아니다. 오히려 더 넓은 의미의 '순환'이다. 어떤 공간에 머무르다 떠나고, 또 다른 공간으로 향하는 반복 속에서, 삶은 하나의 유기적 흐름이 된다.

어느 도시에 머물든 그곳에서의 루틴이 생기고, 애정이 쌓이고, 작별의 아쉬움도 생긴다. 그리고 다시 떠나며, 이전의 경험을 안고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이런 흐름은 정주하는 삶에서는 얻기 어려운 감정의 순환을 만들어낸다. 매번 무언가를 놓고, 또다시 무언가를 만나는 경험은 감정의 탄력을 키워준다.

 

떠난다는 건, 결국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믿음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것은 물리적인 귀환만이 아니라, 나라는 사람의 중심으로 되돌아오는 일일 수도 있다. 그렇게 노마드의 삶은 외형적으로는 ‘떠도는 삶’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점점 더 깊이 중심을 찾아가는 여정이 된다.

 

 

 

'집'이 아닌 '기준'을 세우는 삶

노마드로서 집 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물리적인 거처가 아닌 삶의 기준을 새롭게 세우는 일이기도 하다. 고정된 주소 없이도 일상을 유지하고 정체성을 지켜나가기 위해서는, 외부의 틀이 아닌 스스로 정한 기준이 삶의 기준점이 되어야 한다. 이 기준은 내가 어떤 리듬으로 일하고, 어떻게 쉬며, 무엇을 우선순위로 둘 것인가에 대한 명확한 선택에서 나온다.

 

노마드 생활을 하다 보면 ‘흐름에 몸을 맡긴다’는 말이 종종 들리지만, 그 안에는 나만의 방향감각이 선명하게 자리하고 있어야 한다.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낼지, 다음 달 어디에 있을지, 일을 언제 끝낼지 등을 끊임없이 나 자신에게 묻고, 그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 이 과정에서 외부의 규칙은 최소화되고, 내면의 기준은 더욱 뚜렷해진다.

 

예를 들어, 매일 아침 8시에 일어나고, 하루 3시간은 집중해서 일하고, 하루 한 끼는 직접 요리해서 먹는다고 정했다면, 그것이 바로 나의 ‘집’ 역할을 대신하는 기준이 된다. 물리적인 집은 변해도, 이 기준이 변하지 않는 한 삶은 흔들리지 않는다.

삶의 기준을 세운다는 것은 단지 일정이나 루틴을 만드는 것을 넘어,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를 선택하고 그 선택을 유지하려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 기준이 확고할수록 우리는 어디서든 나를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 집 없는 삶이 결코 방황이나 무질서가 아니라, 오히려 질서 있는 자기 삶의 구성이라는 것을 증명해주는 가장 중요한 근거가 바로 이 '기준'이다.

 

많은 사람들이 집을 ‘돌봄의 공간’으로 생각한다. 내가 지친 날 돌아가 쉴 수 있고, 누군가를 초대해 따뜻한 식사를 나누며 안정을 나눌 수 있는 곳. 그렇다면 집이 없는 노마드는 과연 그런 돌봄을 실천할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방식은 다르지만 충분히 가능하다.

 

노마드의 돌봄은 반드시 하나의 공간 안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여러 지역, 여러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흘러다니듯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친구에게 긴 메시지를 보내 안부를 묻고, 온라인 화상으로 가족과 식사를 나누고, 현지에서 만난 사람에게 정성을 담은 커피 한 잔을 건네는 것—이 모든 것이 새로운 방식의 돌봄이 된다.

 

자기 자신에 대한 돌봄 역시 달라진다. 정해진 공간이 없기에, 스스로의 몸과 마음 상태에 더욱 민감해질 수밖에 없다. 오늘은 피곤한지, 지금 어떤 감정 상태에 있는지 더 자주 체크하고, 필요할 때 과감히 멈추고 쉬는 결정을 내리는 것. 타인이 챙겨줄 수 없는 상태에서 나를 돌보는 습관은 노마드에게 매우 중요하다.

 

노마드는 한곳에 정착해 뿌리내리는 대신, 다양한 장소에서 끊임없이 연결을 만들고, 그 안에서 정서적 안정과 관계의 온기를 찾아낸다. 어쩌면 집 없이 사는 삶은 ‘어디에 있든 돌볼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장하는 삶이다. 장소의 고정성 없이도 돌봄이 가능하다는 것을 스스로 경험할 때, 우리는 돌봄의 의미를 훨씬 더 넓고 깊게 이해하게 된다.